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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3’ 한국 비엔(BIEN) 대회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필자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안효상 이사장
인터뷰어/사회/대담
근대 세계가 국민국가(nation-state) 및 이런 국가 사이의 체제(inter-state system)로 성립하자 보편적 사정(射程)을 가지는 진보적인 의제와 운동은 언제나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 국민국가 내부에서 진보적인 의제를 구현하려 하면서도 국제적인 수준에서의 협력과 공동 행동을 모색하고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 말이다.
지난 세기말 새롭게 시작되어 21세기 사회적, 생태적 전환을 위한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기본소득 의제와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알고 있고, 또 우리가 그렇게 하듯이 각국의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자국 내에서 기본소득을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과 통로를 모색하고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 의제와 운동은 시작부터 국제적이었으며, 이런 차원이 없다면 기본소득은 보편적이고 해방적인 성격을 상실할 것이다.
기본소득 의제와 운동의 국제적 노력이 모이는 장이자, 다시 이것이 흘러나가는 통로가 바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BIEN congress)¹⁾다. 1986년 벨기에 루뱅에서 첫 번째 대회가 열리고 이 자리에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가 만들어진 이래,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와 비엔 대회는 기본소득에 관심 있는 개인과 집단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고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논의를 증진하는 역할을 해왔다.
2004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유럽 차원에 머물던 네트워크를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로 확대하기로 하고, 2006년 처음으로 유럽 이외의 지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대회가 개최되면서 기본소득 의제와 운동은 말 그대로 세계적인 차원을 얻게 되었다.

2016년 서울 대회: 사회적, 생태적 전환과 기본소득

대회 운동(congress movement)에서 적절한 시간 간격을 두고 열리는 대회는 당연하게도 여러 차원의 성과와 노력이 어우러져 드러나는 하나의 표현이며 퍼포먼스이다. 2016년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열린 서울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서울 대회는 한국 기본소득 운동의 중심 기관인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발전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매듭이었다. 2009년에 창립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처음에는 소수가 모인 연구 집단이었다. 뒤늦게 받아들인 기본소득의 여러 차원에 대한 학습과 연구를 중심으로 해서 이를 알리려는 시도가 주된 활동이었다. 이 속에서 기본소득은 경제적, 기술적 변동 그리고 불평등에 대처하는 유력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후퇴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초라는 점을 확인했다. 또한 적절한 조세 개혁을 수반할 경우 당장이라도 ‘부분 기본소득’이 가능하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이런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는 단일 쟁점이지만 사회 변화에 커다란 잠재력이 있는, 21세기 대안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이를 하나의 사회 운동으로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가 2014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를 회원 단체이자 사회 운동 조직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2016년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런 흐름 속에서였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아무런 조건 없이 받는 기본소득은 ‘상식’에 반하는 아이디어이다. 특히 가치가 노동의 산물이며,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노동에 기초한 소유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중심으로 논투가 벌어지는 근대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은 금성과 화성의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생각이며 그런 점에서 낯선 일이다. 따라서 기본소득 같은 아이디어가 수용되기 위해서는 상황의 압력과 시차가 필요하다.
상황의 압력은 기존의 제도나 패러다임이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시차는 그런 상황을 불가피하게 다른 관점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극단에서 사고할 때 발생한다. 2016년을 전후로 하여 ‘청년 문제’나 급격한 기술 변화로 인한 일자리 없는 미래에 대한 전망 등이 상황의 압력으로 시차를 발생시켰다.
세 번째로 아이디어를 제도로 실현하기 위해 실질적인 시도를 하는 정치인과 정치집단이 등장했다. 한국의 정치 지형을 감안할 때 이런 흐름은 민주당과 진보 정치 세력 사이의 어디쯤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컸다.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이 이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성남 청년배당이다.
네 번째로 상황의 압력이자 기본소득 실현의 돌파구가 될 만한 사건이 세계적으로 벌어졌다. 스위스 국민투표와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이 그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이자 보편적 복지국가로 알려진 두 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은 기본소득이 더 이상 낯선 아이디어가 아니라 고려할 만한 어떤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여러 차원의 노력과 힘들이 모여 특유한 색깔을 보인 서울 대회는 외형상의 성공뿐만 아니라 기본소득 의제와 운동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먼저 대회 주제가 “사회적, 생태적 전환과 기본소득”이었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이런 주제를 제시하게 된 것은 더 이상 근본적인 변화를 미룰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변화에서 기본소득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었다.
다음으로 이 대회의 일부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General Assembly)에서 기본소득의 정의가 새로 채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의 도입이 취약한 사람들의 처지를 더 나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가이드 라인에 해당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개별적으로 정기적으로 현금으로 지급되는 소득”이라는 정의를 얻게 되었고, 기본소득과 다른 사회서비스 혹은 복지 제도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국 사회 내적으로 보자면 2016년 서울 대회는 당시로서 결집할 수 있는 기본소득 운동의 개인과 집단이 한자리에 모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기본소득이 이제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의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기본소득과 경합하게 될 대안과 의제가 아직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제기되지 못할 상태에서 기본소득이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23년 대회: 현실 속의 기본소득

7년 만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가 다시 한국에서 열리는 직접적 배경은 특히 한국에서 기본소득 의제의 진전이다. 회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2018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해서 경기도는 청년 기본소득을,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은 농민 기본소득(농민수당)을 실시하거나 실시하려고 했다. 또한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집권여당의 후보는 액수는 소소하지만 기본소득을 가장 중요한 공약의 하나로 내걸었다. 이런 흐름 속에 더해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속에서 제기되고 집행된 재난 기본소득(재난 지원금)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진 바 있다. “한국은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과 기대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2023년 대회의 주제가 “현실 속의 기본소득”인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지난 대통령선거 결과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기본소득 공약을 내세운 후보의 패배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이면서 권위주의적 정권의 탄생은 그동안 힘겹게 전진했던 기본소득 의제의 위치를 순식간에 후퇴시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동안 뿌려진 기본소득의 씨앗이 도리어 여기저기서 싹이 트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대통령선거라는 불꽃에 가려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던 것이 강렬한 빛이 사라지고 난 다음 제대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농민 기본소득과 농민수당은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 곳에서 실시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대선 패배와 무관하게 기본소득 의제는 버려질 수 있는 의제가 아니며, 도리어 대선 패배에 대한 평가 속에서 향후 더 중요한 의제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에서 “현실 속의 기본소득”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현실 속의 기본소득”이라는 주제는 한국적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2016년의 스위스 국민투표와 2017-18년의 핀란드 실험만큼 강렬하지는 않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과 실험은 전 세계적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보장소득을 위한 시장(mayor) 모임의 움직임 그리고 스페인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실험은 이런 흐름이 현재 도달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2023년 대회가 기본소득 의제와 운동의 진전을 축하하는 자리는 아닐 것이다. 지난 십 년 사이에 우리는 기본소득이 아이디어에서 현실로 혹은 정책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과정은 두 가지 굴절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하나는 실험이라는 굴절이다. 기본소득 실험의 경우 재원 마련을 실험에 포함할 수 없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주요한 목표이자 효과 가운데 하나인 불평등의 개선을 확인할 수 없다. 이런 측면 때문에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목표인 빈곤 완화 혹은 빈곤 퇴치를 위해 모두가 아니라 일부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게 효과적인 사회 정책이라는 주장이 기본소득 주위를 언제나 배회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범주형 기본소득이라는 굴절이다. 제한된 재원을 가지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보장하면서 기본소득의 효과를 검증하려다 보니 불가피하게 일부에게만 기본소득을 주는 실험 혹은 정책이 나왔다. 이런 정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가는 전망을 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현실 속의 기본소득”은 이런 실험과 정책이 가진 난점을 드러내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기존 실험과 정책의 난점을 드러내는 일은 실험과 정책을 분석하는 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기본소득에 관한 그리고 기본소득을 둘러싼 쟁점 전반을 검토하는 일이 될 것이다. 특히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기본소득의 정치를 재구성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오늘날 “현실 속의 기본소득”은 한 차원을 더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후변화와 기후 정의이다. 사실 기본소득의 생태적 효과는 일찍부터 이야기되었다. 탈성장의 관점에서 볼 때 모두에게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은 고용노동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주며, 이는 성장-고용이라는 패러다임을 깰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기후 체제에 대한 적응과 기후 정의는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과제가 된 오늘날 기본소득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불안전과 불확실의 시대에 모두에게 단단한 삶의 기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체제 전환의 중요한 요소이자 정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현실 속의 기본소득”은 “사회적, 생태적 전환”과 맞닿아 있다.
끝으로 2016년 서울 대회가 한국 기본소득 운동의 자기 발전 속에서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2023년 대회도 그러할 것이다. 이는 변화된 조건에 기초할 것인데, 여기에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 및 정치 지형의 변화가 포함된다. 물론 이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1) BIEN은 Basic Income Earth Network의 약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