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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인정의 인터뷰] 기본소득당 용혜인 상임대표

필자
인터뷰어/사회/대담
기본소득신진연구자네트워크 한인정 대표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을 꺼내기 머쓱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상임대표 겸 국회의원은 상임위만 세 개다. 행전안전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에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위까지. 이태원 참사 후 언론에 그의 이름이 자주 나온다. 그만큼 하는 일이 많다. 그는 두 돌이 안 된 아기 엄마다. 바쁜 몸을 이끌고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다가 곯아떨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듣는 노래는 있으세요? 의원님만의 플레이리스트요.” 그의 아들 단과 남편과 함께 집에 가는 길. ‘문어의 꿈(안예은)’을 듣는단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뒷자리에서 음악을 튼다.
문어의 꿈
나는 문어 꿈을 꾸는 문어 꿈 속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나는 문어 잠을 자는 문어 잠에 드는 순간 여행이 시작되는 거야
높은 산에 올라가면 나는 초록색 문어
장미 꽃밭 숨어들면 나는 빨간색 문어
횡단보도 건너가면 나는 줄무늬 문어
밤하늘을 날아가면 나는 오색찬란한 문어가 되는 거
야 아아아 아아 야 아아아 아아
깊은 바닷속은 너무 외로워 춥고 어둡고 차갑고 때로는 무섭기도
헤 애애애 애애 야 아아아 아아
그래서 나는 매일 꿈을 꿔 이곳은 참 우울해
독특한 음색, 단순한 멜로디에 매료된다. 몇 번이고 들으며 차창을 바라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빌딩 숲에서 쏟아진다. 가슴이 시큰해진다. 누구든 꿈을 꿨다. 꿈을 꾸면 뭐든지 될 수 있다고 들었으니. 어른이 되고, 눈을 뜬다. 깊은 바닷속. 외롭고, 춥고, 사실 너무 무섭다. 외로움은 홀로 견뎌야 하는 숙명인가. 버스 차창 너머, 환한 그의 집무실 방향. 그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쓴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회의원, 엄마, 아내, 며느리, 딸, 활동가. 그를 누르는 무게 너머 그를 깊이 바라본 적 있던가.
답가를 보낸다. 같은 가수가 부른 ‘카코토피아’. 유토피아와 정반대인 ‘절망향’이라는 의미다. 외롭고 어두운 이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상상의 공간이다. 그곳에선 우울과 우울이 만난다. 그 깊은 감정들이 연대하며 또 다른 힘을 만든다. 뜻대로 되지 않고,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 벽을 부수고, 그 위로 올라간다.
용혜인 의원. 깊은 바닷속 그의 옆에서 함께 외롭고, 함께 무서워하며, 함께 슬퍼하며 저 벽을 부수고 위에 올라서고 싶단 생각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각자 꿈꾸기보다, 저 벽을 부스고 저 너머에서 매일을 꿈처럼 살면 어떨까. 그렇게 서로 곁을 내주며, 슬픔으로 연대를 이어가면 좋겠다. 깊은 바닷속도 서로의 온기로 따뜻해질 테니.
인터뷰는 11월 29일 용혜인 의원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평범한 모범생의 세상

집무실이 넓고 좋아요. 사실 국회의원이 누구나 되는 직업은 아니잖아요. 국회의원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렸을 때 장래희망에 국회의원 이렇게 적어내고 그러셨을까요? (웃음)

전혀 아니에요. 제가 완벽한 S(현실주의. 용혜인 의원 MBTI는 ISTP다)거든요. 그래서 그냥 대학에 가는 것이 목표였어요. 확실한 건 ‘여성이 하면 좋은 직업’ 이런 데 반감은 있었어요. 이건 엄마가 보면 안 되는데(웃음). 엄마는 여자 직업으로는 공무원, 교사 이런 게 최고다.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면 팔자 편하다고 생각하셨죠. 지금도 엄마는 제가 쌍꺼풀 수술 안 한 걸 안타까워해요. 피부관리해라, 살 좀 빼라 이런 이야기도 하시는데. 그런 게 너무 싫었고요. 그 반편향인지 정치, 뉴스 등 남성의 영역이라고 여겨진 것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했고요.

아마도 어머니는 딸이 행복하길 바라니깐. 그게 여자로서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럼 의원님은 여의도 정치에서 직접 플레이어로 활동하려 했던 걸까요?

그건 아니고요. 저는 그냥 당직자라던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참여한다거나 그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럼 어쩌다 정치판으로 뛰어든 거예요?) 농담반 진담반 정치외교학과 나와서 흔하지 않게 전공 살려서 정치한다고 말하는데요. 사실 과에서 공부한 것보다는 학교 밖 제 삶과 활동을 통해 배운 게 많아요. 제가 모르던 세상이죠. 대학교 때 고시원 생활을 한 적이 있거든요. 부모님은 제 고시원이 허름하니깐 집에 돌아가시면서 우셨다는데. 저는 독립해서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환상은 며칠 안 갔어요. 방음이 전혀 안 돼서 옆방 알람 소리에 깨기도 하고, 옷을 넣어둔 빨래망이 없어지기도 하고, 속옷만 입은 남자들이 돌아다니기도 하고요. 매일의 삶이 외롭고 어둡고 그랬었요.

똑같은 상황도 달리 대응할 수 있잖아요. 어떤 청년들은 쇼미더머니에 나오는 힙합 가사처럼, 내가 이렇게 성공했어, 부가티 타고 다니면서 돈 흩뿌려보고 싶다고 하니까요. 나 혼자라도 이 악물고 성공하고 싶단 생각은 없으셨어요?

혼자서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한텐 디딤돌조차도 없었어요.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집이 당시에 어려워졌는데. 사회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거든요. 당장 쓸 돈은 없는데. 집도 있고 차도 있고 그러니깐 기준에서 밀려난 거죠. 그래서 기본소득 접했을 때도 ‘무조건성’에 확 끌렸어요.

다양한 사회운동을 벌였죠? 무가당(무적의 가짜노동당)도 만들고, 최저임금1만원위원회, 희망버스에 참여하기도 하고요. 한겨울에 한국거래소 앞에서 텐트도 치고요. 어떤 걸 느끼셨나요?

학교 앞에서 아르바이트 실태조사를 하는데, 어떤 편의점에서 밤 10시부터 아침 10시까지 일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만났어요. 야간에는 손님도 없고 혼자 일을 하잖아요. 시간을 바꿔서 일하니깐 사회관계가 끊기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가면 말할 사람이 생겼다고 너무 좋아했어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5~6평 공간에서 밤에만 사는 사람. 고립감. 그때 일(노동)에 대해 고민했어요. 생계가 보장된다고 해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존엄한 노동 이전에 존엄한 삶을 톺아봐야 한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노동시간 단축을 여기저기 외치는데. 노동이 단축된 그 시간을 ‘나답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은 생략된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삶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를 하고 싶어요. 하루의 끝에 있는 시간이 궁금하거든요.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려면 안정된 기반이 필요하잖아요. 어떠셨어요?

즐거웠어요. 발랄하게. 기존의 운동권 문법과 다르게 하려고 했죠. 하지만 처절했어요. 한겨울에 한국거래소 앞에 발전기 켜놓고 잘 때인데 진짜 너무 추웠거든요. 피부에 뭐가 올라오고. 벌레가 물고. 툭하면 연행당하고, 잡혀가고. 저는 여러 번 도망치기도 했어요. 당시 제가 대학교 4학년인데 내일 생활비도 없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활동할 수 있을까 고민도 들고요. 그래서 2012년에 대학동 반지하 방을 얻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됐죠.

세월호와 N년째 4학년 용혜인, 이태원 참사 그러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지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는 그만두신 거네요. 침묵행진을 제안하셨어요. 어떤 마음으로 그러셨는지 궁금해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외치는 저들에게 ‘뭐라도 외쳐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죠. 당시 단원고 학생이 침묵시위에 왔어요. 학생이 울면서, 세월호 참사가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고, 많은 사람이 함께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 말에서 넘쳐흐르는 슬픔을 느꼈어요. 그런데 이 슬픔을 어디에도 나눌 곳이 없었거든요. 혼자 곪아 터진 상처를 나누고, 이야기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겠구나. 그게 공동의 추모구나 그런 거요. 오신 분들 모두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삼풍백화점, 서해 훼리호 등 반복되는 참사를 막아내지 못한 기성세대의 미안함, 이제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지더라고요.

2014년에 목격했던 장면이 2022년에도 재현됐습니다. 이태원 참사인데요.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분노가 커요. 세월호 당시에도 저랑 네다섯 살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제 또래 청소년들이 수학여행 가다가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를 대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태도가 분노스러웠거든요. 지금도 그 모습이 재현되는 것 같아서 분노가 생겨요. ‘선동하지 말라’, ‘정치화하지 말라’며 그냥 조용히 추모하라는 말에 특히. (국민의힘은) 세월호 진상조사를 아홉 번 하면서 세금을 수백억 낭비했다고 말하는데, 당시 진상규명을 집요하게 방해했었던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아홉 번의 조사가 필요했던 거죠. 그런데 정쟁 때문인 것처럼 표현하죠. 그런 발언을 보면서 ‘8년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정말 이번엔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국조특위(용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이 되셨는데, 어떤 내용을 밝혀내는 데 방점을 두실 예정인가요.

이상민 장관 해임 건의안이 나오면서 여당이 국조 보이콧 시동을 거는 상황이라, 그것부터 잘 해결하고 할 것 같아요. 특수본은 사건 발생 시각인 10시 15분 이후 현장 대응만 중점을 두고 있어요. 현장 대응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거죠. 그런데 참사 발생 이전부터 살펴 참사 발생 원인을 봐야 해요. 지금 상황에선 특수본 수사가 진행되면서 관련자들이 입을 다물고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려 할 거에요. 그걸 이겨나가면서 원인을 파헤쳐야죠.

사이: 정치인 용혜인

2016년 현실정치에 등장합니다. 그 해 노동당 총선 비례후보로 출마하셨죠. 온 국민 기본소득 30만원 실현을 공약으로 내세우셨어요. 비례대표 출마 인터뷰 중에 저성장 전제로 일자리 문제 해결하는 것은 노동시간을 줄여서 일자리 만드는 것밖에 없다. 좋은 일자리를 나누고 노동시간 단축하면서 줄어드는 소득은 기본소득 등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당시엔 좀 기계적으로 기본소득을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현실적인 소득보전 측면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주장했던 것 같아요. 공부를 하면서 ‘정당성’의 문제로 다가섰죠. 앞으로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하는데, 공유부에 깃든 정당한 몫을 찾자는 원칙을 분명히 세워야 하겠죠. 그리고 국민을 설득해야 해요. 그럼 기본소득이 적은 금액이더라도 의미가 있어요. 정당한 것은 당연히 정당한 자리에 돌려야 하죠. 그 파이는 점차 늘려가면 되고요.

그러다 노동당 대표단으로 선출되고 이후 탈당, 기본소득당 창당준비위원회 발족까지 많은 일이 있었죠. ‘청년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고민도 있었을 것 같아요. 어떤 고민이 있었을까요?

운동권을 포함해서 어른(?)들이 원하는 청년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원하는 청년이 뭔가요?) 나 대신 나의 이념을 충실히 실천해줄 사람이요. 집회도 나가고 나의 말도 거스르지 않고요.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건네면 건방지다고 여겨지는 그런 틀에 박힌 청년이요.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어떻게요?) 생각하는 거죠. 끊임없이. 나는 이걸 왜 하는가. 가장 부딪혔던 것이 ‘노동’이었어요. 누군가 노동해방의 뜻이 노동자들이 노동현장에서 더 나은 처우를 받고 노동3권을 자유롭게 행사하면서 사용자와 대등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선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요. 그런데 이게 ‘노동’을 버리자는 이야기로 들렸나 봐요. 저는 ‘노동’ 너머에 있는 삶을 보자고 말하고 싶었어요. 지금도 고민이에요. 혹자는 노동 개념을 확장해서 많은 활동을 포괄하려고 하는데. 그런 과정 대신 그냥 ‘삶’ 자체를 볼 순 없을까. 그러면 ‘이건 노동이고 저건 노동이 아니’라고 할 필요도 없잖아요. 각자가 원하는 삶을 살면 되는 거고요. 그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또 실현하고 싶다는 생각에 비슷한 마음을 모아 2020년 1월에 기본소득당을 창당했어요.

1월에 결성한 신생정당이 4월에 총선을 마주하면서, 선거연합을 하고 그 과정에서 탈당 사태도 있었습니다. 당시 의원님은 민주당과 연합을 해서라도 원내 진출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셨는데 여전히 그 결정엔 후회가 없으신가요?

후회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민주당 입장에서 보면 위성정당이지만, 저희 입장에선 선거연합정당이었어요. 우리의 원칙이 ‘기본소득 주장에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였고 그 원칙이 보장된다고 생각했기에 함께 할 수 있었어요.

기본소득당 정치인 용혜인

국정감사 때 날카로운 지적으로 주목을 받으셨습니다. 국정감사에서 어떤 내용에 방점을 찍고 질의하시는지요?

국정감사는 저희가 관심이 있는 이슈를 검토하면서 지적할 내용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피감기관에서 발생하는 노동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죠. 기재위 국정감사를 할 때, 조폐공사에서 여권발급 업무를 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전속으로 일을 하는에도 일용직으로 분류되고 있거든요. 문재인 정부 공공부문 정규직화 가이드라인에 의해 정규직화 됐어야 하는데 안 됐죠. 코로나19로 여권 발급량이 줄어드면서 일감이 줄어 이 분들의 노동이 불안정해졌어요. 휴업수당도 받지 못하고요. 그런 문제점을 지적했죠. 또 한 번은 한국투자공사에 다니던 21세 고졸 청년인턴이 업무부담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어요. 당시 공사 사장은 국감장에 그의 일기장을 가져와 읽었어요. 산재가 아니고 개인적 이유로 죽었다고 말하려고요. 자기 상황을 모면하려고 죽은 이의 일기장까지 들고 온 공사 사장에게 너무 화가 나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지적했죠.

기본소득으로 옮겨가 볼게요. 어떤 상황에서도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의원님을 다른 의원들은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해요. 국회에선 기본소득에 대한 인식이 어떤가요?

실은 의원 중에는 기본소득을 얘기하는 분들이 거의 없어요. 우선 기본소득에 대해 잘 모르고요. 호의가 있는 분들도 기본소득이 언젠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인데 지금은 시기상조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공유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당장 태양광 기본소득 등도 이야기 나오고 있잖아요) 햇빛연금이라던가, 제주도 대용량 풍력에너지에는 관심이 있으시죠. 다만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좀 복잡하게 보는 것 같아요. (어떤 이유로요?) 딱지가 붙어있다고 보는 거죠. ‘특정 정치인이 무차별적으로 뿌리는 돈’이라는 딱지요.

기본소득당은 대선과 지선, 두 번의 큰 선거를 치뤘어요. ‘기본소득이라는 이슈를 중심으로 대중에게 평가를 받았던 건데요. 성과를 어떻게 보시나요? 앞으로 기본소득 운동과 정치의 방향은 어떻게 가야 할까요?

저희가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기본소득을 ‘금액’으로 내세운 측면이 있어요. 역사성이 있는데. 창당을 금액으로 했거든요. ‘당신이 누구든 매월 60만원’ 이렇게요. 이게 사람들에게 닿는다는 감각이 있었고요. 그런데 저희 예상보다 호응이 저조했어요. 그러면서 기본소득에 딱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특정 정치인이 뿌리는 무치별적 돈이라는 딱지요. 그래서 지금은 이 프레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죠. 그게 바로 공유부에요. 공유부 철학이 국민에게 가닿는다면, 모두의 몫이라는 정당성이 모두에게 가닿는다면, 그 프레임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고 봐요.

국회에서 토론회(34)를 활발히 열었습니다. 563개의 법률안을 단독발의 혹은 공동발의 하셨고요. 눈에 띄는 법률안이 있어요.(기본소득공론화 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 탄소세 법안, 탄소세 배당에 관한 법률안, 토지세 및 토지배당에 관한 법률안 등) 국회 입성 당시 온 국민 기본소득법을 발의하겠다고 하셨는데, 그 법안은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사실 제가 낸 법안들이 블랙홀에 빠졌어요. 기본소득당 의원이 한 명인데 모든 상임위와 소위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럼에도 계속 문을 두드리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다음 총선까지 타이밍을 노리고 있어요. 기본소득 아젠다를 리부트하는 거죠. 대선에서 기본소득이 논의되긴 했지만 이재명 후보의 정책 중 하나에 머물면서 유의미한 충격을 만들지 못했다고 판단해요. 2023년 한국에서 여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가 중요한 것 같아요. 기본소득을 중심으로 정치적 힘을 모으로 기본소득 법안 발의까지 가야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의정활동 중 단이가 태어났습니다. 단이가 살아갈 세상에는 기본소득이 있으면 좋겠는데요. 어떠세요. 기본소득이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뛰는 한 사람으로서, 기본소득이 있는 세상에서 단이는 또 의원님은 무엇을 할 것 같으세요?

제가 이런 말을 해요. 단아. 너 아동수당 끝나기 전에 꼭 기본소득 받게 해 줄게. (웃음) 기본소득이 끝이 아니고, 기본소득 너머에는 그 세상의 과업이 있겠죠. 기본소득이 단순히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꿔내는 일이 됐으면 해요. 더 자유롭게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세상에서 저도 단이도 각자의 색을 찾아가는 다양한 일을 할 것 같아요.

그 길을 함께 걸어갈 모두에게 한마디 부탁드려요. 지면을 통해 전하는 감사함이랄까요.

우리는 ‘각자 다르게 살 수 있는’ 같은 꿈을 꾼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꿈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국회의원이라는 역할을 맡은 거고요. 그 꿈에 관한 모든 역할이 소중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고생하는 모두에게 너무 고맙고, 앞으로 만날 모두에게 반가움을 미리 전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다른 삶을 응원하는 원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