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시절이었고 또한 최악의 시절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두운 시절일수록 희망을 찾는 움직임도 커진다는 뜻일까. 겉으로 화려한 시절도 안으로 슬픔과 분노가 쌓인다는 뜻일까. 윤석열 정부가 있는 이 시절은 훗날 뭐라고 평가할까. 윤석열 정부에 대해 지금까지 20대 여성 청년들의 평가는 ‘최악’에 가깝다. 정부가 밀어붙이는 여성가족부 폐지만 보더라도 그렇다. 윤석열 정부와 거의 모든 정책에서 다른 길을 가는 기본소득당의 여성 청년 당원들은 정부 첫해를 어떻게 돌아볼까. 최악의 시절을 견디며 최고의 시절을 열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할까. 그래서 기본소득당 여성주의 의제조직 ‘베이직페미’ 회원들과 대담을 잡았다. 대담은 2022년 11월 25일 중앙당 회의실에서 열렸다.
2022년 3월에 대선이 있었죠.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기까지 과정을 어떻게 보았나요?
서영
로라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가 된 시점부터 모든 게 거짓말 같았어요. 한때 ‘대쪽 검사’였다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맞서면서 보수의 희망이 됐잖아요. 내용이 무엇이든 조회 수와 구독자 수만 많으면 인정받는 유튜브 채널처럼, 윤석열 후보도 일단 유명해진 후에 유명세를 동력 삼아 대권주자가 됐죠. 선거 과정에서 저는 윤 후보의 부족한 공감 능력과 문제적 인식이 우려스러웠어요. 여성, 젊음, 녹색 이미지를 얻으려고 신지예 씨(전 녹색당 서울시장후보)를 영입했으면서, 20대 남성 표를 모으기 위해선 이준석 전 대표와 함께 명백히 반대되는 (반여성적인) 공약을 내걸었죠. 필요할 때만 청년 정치인을 활용했죠.
대선 기간을 생각하면 페이스북 일곱 자 공약이 떠올라요. ‘여성가족부 폐지.’ 그걸 아무 설명도 없이 표어처럼 공개하는 모습에 정치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이 깨졌어요. 정치적 말하기는 설득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비전을 제시해야 하고요. 이건 비전 제시가 아니라 세상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그대로 가져온 거죠. 저는 정치운동이 크게 퇴보했다고 봐서 절망감이 컸어요. 이전에도 정치적인 주장을 하면서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적은 있겠죠. 하지만 그때는 미사여구로 포장이라도 했어요. 일곱 글자 공약은 그런 수고조차 거부했죠. 명분이나 체면을 챙기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성인데, 이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원정
민아
윤석열 후보 손바닥에 쓴 ‘王(왕)’ 자가 논란이 됐잖아요? 윤석열이라는 사람이 ‘대통령’ 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준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대통령은 권력의 정점이고 힘이 있는 자리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윤 후보는 대통령직을 정치하는 자리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부리는 자리로 여기는 것 같았어요. 여가부 폐지 공약에서 아무런 설득도 하지 않는 건 이런 인식이라고 봐요. 권한이 내게 있으니 내가 결정하겠다는 거죠.
당시 윤 후보를 보면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떠올렸어요. KKK나 백인 남성들의 백인우월주의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들었는데 그와 비슷한 일이 한국에도 일어난 거죠. 윤 후보가 선거 내내 별다른 비전 없이 마초다움을 과시하는 것도 불편했어요. 후보만 문제가 아니라 취임 후 정부를 보니 대통령부터 한참 아래 실무 라인까지 일을 못해요. 지난 정부에서 그나마 이룬 주 52시간 노동시간이나 언론의 자유, 북한과의 평화무드 등 성과도 하나 둘씩 무너지고 있어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정세가 위태로운데 대북 관계도 악화일로라서 전쟁이 터질까 걱정이에요.
윤 후보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도 컸는데도 그가 대선에서 승리한 이유는 뭘까요?
서영
원정
양당제의 폐단 때문이죠. 투표 결과가 거의 반반이었잖아요? 결선투표 같은 보완책이 없는 이상 유권자들은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 가운데 A나 B를 찍고, A와 B는 정책과 노선으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지저분한 상호 비방에 골몰하죠. 소수정당의 목소리는 더욱 힘을 잃고요. 저는 우리 당의 목소리와 정책적 비전에 충분히 힘과 울림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양당의 파도 앞에선 사람들의 귀에 가닿게 하는 것조차 어려워 공허했어요.
그래서 보수적인 유권자들도 당선될 만한 윤석열 후보밖에 뽑을 사람이 없었던 거죠. 안철수 후보가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결국 투표 직전 사퇴했죠. 그러니까 보수 지지층이 모두 윤석열 후보로 결집했잖아요. 이분들은 민주당의 재집권이나 진보정당의 성장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어쩌겠어’ 하는 심정으로 윤석열 후보를 찍는 거죠.
로라
유권자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이렇게 적은 정치 환경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정치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지 못하고, 유권자가 자신이 바라는 정책과 노선에 투표할 수 없는 상황, 투표 행위가 ‘거대 양당’을 향할 때만 의미를 갖는 상황은 참 부조리해요. 사람들이 정치에 거는 기대나 상상력을 쪼그라들게 만들어요. ‘거대 양당 앞에 사표가 돼버리고 마는 나의 선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게 돼요. 1번 아니면 2번을 찍는 투표가 정치적 의사 표현의 전부는 아닌데 말이에요.
역대 최대 득표로 당선되고도 왜 대통령 지지율이 20~30%에 머물 만큼 낮았을까요?
서영
로라
취임 후부터 대통령 지지율이 계속 떨어진 건 끊이지 않는 인사 논란과 대통령실 용산 이전 문제가 해결 혹은 설명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해요. 자기는 능력과 공정을 강조하면서 능력 없는 주변인들을 요직에 앉히는 모습이 반복되니까 민심이 떠나죠. 대통령의 권한과 국가 예산을 이용하는 행위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죠. 여성가족부의 쥐꼬리만 한 예산은 비효율적인 낭비라 당장 없어져야 한다면서, 대통령실 이전에 드는 수백억 원은 권위주의에 반대하고 자유를 지키는 일이라고 포장했죠.
대통령실 이전은 비용도 많이 들어서 효율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잖아요. 이런 비합리적인 결정을 손쉽게 하는 모습에 두려운 마음이 들어요.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일을 앞으로 계속 마주하겠구나 싶죠. 대통령과 일하는 공무원들도 다 싫을 거예요. 사무실 이사 준비해야 하고, 달라진 업무공간에 적응해야하고. 근데도 이걸 밀어붙이는 모습이 ‘회사에서 모두가 싫어하는 부장님’ 같아요. 대통령은 일개 부장님이 아니고 투표로 선출되는 정치인인데 모두 싫어하는 일을 해도 아무 타격도, 제재도 받지 않는 것이 가능하니 놀랍습니다.
민아
그래도 ‘당선되고 나면 뭔가 하는 게 있겠지’ 싶었는데 지금 보면 할 줄 아는 건 없고. 그래서 평가할 만한 게 없어요. 충격적이던 건 해외순방 일정 중에 술 마시고 숙취가 남은 얼굴로 기자 앞에 섰던 장면이었어요. 대통령의 역할을 하려고 대통령이 된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대통령이 된 것 같아요.
10.29 이태원 참사는 또래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충격이 클 텐데요, 이 참사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에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민아
원정
처음에는 우리 당 용혜인 국회의원의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와 현안 질의를 열심히 챙겨봤었어요. 그런데 화가 나서 더 이상 못 보겠더라고요. 오세훈 서울시장이나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매번 같은 말만 반복하고요. 관련 자료를 보면 참사 전후로 행정 공백이 명백히 드러나는데도 책임지고 사퇴한다는 사람이 없어요. 저는 ‘이걸 계속 보고 있으면 심리적으로 위험해지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세월호 트라우마’가 올라오기도 하고요. 당시와 똑같으니까요.
세월호도 이태원 참사도 희생자들이 제 또래라서 ‘우리 세대는 인구 그래프가 푹 꺼져있겠구나’ 하는 상상을 했어요. 가장 어이없고 화났던 건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기사였어요. 대통령이 참사 당시 경찰이 112 신고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는데 대통령실이 이 내용을 보도자료로 뿌린 거죠. 그런데 국민이 원한 건 대통령의 분노가 아니라 책임감 있는 태도와 진심어린 사과였거든요. ‘책임져라’, ‘사과하라’는 요구는 회피하면서 국민 정서에 공감하는 척 보도자료를 낸 게 기만이라고 느꼈어요. 이런 참사에 대통령으로서 책임지는 방법이 무엇인지 관해 고민이 없구나 싶어요.
서영
로라
대통령뿐 아니라 장관들도 여전히 검사 같은 태도가 보여요. 사법적 판단이 나기 전에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 말이에요. 저는 책임지지 않는 모습도 화가 나지만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서 행안부 장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느꼈어요. 카메라 앞에서 참사에 책임이 있는 장관에게 그러는 건 ‘검사적 태도’를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보여요. 그 대통령에 그 장관이라고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참사 이후 직원들에게 피자를 돌리면서 그걸 굳이 보도자료로 언론에 뿌렸죠. 용혜인 의원이 말했듯 이게 참사를, 그리고 국민을 대하는 현 정부의 태도라는 점에서 참담하죠.
검사 집단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서도 검사의 문화가 공고한 것 같아요. 저는 검사적 태도로 정치를 하는 것이 두려워요. 이태원 참사는 너무 슬픈 사건인데 이걸 단지 ‘정치적으로 책잡힐 거리’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마치 재판에서 불리한 증거를 마주하는 것처럼요. 모든 걸 다 리스크 관리나 법정 다툼처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에 대한 예의도 없는 것 같고요.
윤석열 정부 임기는 아직 4년 넘게 남았는데, 이 시기를 어떻게 넘겨낼지 말해주세요.
원정
서영
정부여당 지지자인 아버지가 대통령이 기자들과 싸움하는 걸 옹호하면서 “(기자들이) 자꾸 꼬투리를 잡는데 어떡하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대통령은 정치를 하는 사람이고, 정치란 원래 끊임없는 논쟁이다. 논쟁이 싫으면 논쟁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잘해야 한다”고 반박했어요. 이 대화에서 저는 대통령도, 지지자들도 ‘좋은 정치’를 바라는 게 아니라 ‘정쟁’에서 이기기만 바란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모든 게 승패의 결과로 정리되진 않잖아요. 싸우더라도 왜 어떻게 싸웠고 그 과정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가 중요하죠. 저에게 ‘정치’란 이런 과정 전체를 뜻해요. 대통령이 남은 임기라도 ‘정치’를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우리의 상황은 ‘이후’를 생각하기 힘든, 현재를 부여잡고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아요. 그래서 활동가로서 동료 시민의 죽음이나 기후위기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막기 위해 어디서부터 희망을 붙잡고 나아가야 할까, 무엇을 시작할까 고민하려고 해요.
민아
저는 ‘지금은 뭘 해도 괜찮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 사회 전체적으로 퇴보하는 감수성에 동화되거나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싶어요.
‘베이직페미’ 회원과 대담은 저녁 7시에 시작해 9시를 넘겨서야 끝났다. 할 말이 많았던 까닭은 그만큼 좌절과 분노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담자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옆 사람을 다독여주겠다고 했다. 대담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지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